‘고맙다’는 말은 참 신기한 말이다. 얽매일수록 무거워지고 멀리 있으면 더없이 가볍다. 언제나 지나간 일에 대해서만 할 수 있다. ‘고맙다’는 말을 건네려면 그 지나간 날로부터 내가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유석규의 에세이집 《고마워! 아리가또, 땡큐(큰나무)》의 타이틀은 그런 의미이다. 저자가 살아내야 했던 지난 청춘의 날들, 너무 생생해서 더럽고 치졸했던 날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며 보내는 감사의 인사.
지금은 제법 번듯해져 스타패밀리엔터테인먼트 해외 프로모션 담당 이사, 오산대학교의 일본어 강사 같은 소개 글을 줄줄이 달고 있는 저자 유석규를 이 책과 매치시키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의 화자는 그런 화려한 타이틀의 주인공이 아니라 단 돈 5000엔이 없어 열흘 동안 밥을 굶을 위기에 처한, 가난과 비참에 찌들어 도서관 앞에 멍청하게 앉아있던 일본 유학생이니까. 당장 내 코가 석자인 그에게서 흔히 우리가 해외 유학기에서 기대하는 열린 마음과 불굴의 열정, 배우는 마음가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여유롭고 인자하며 박애적인 시선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아주 답답해진다.
이 책은 저자가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 만났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대가 일본인데도 정작 일본 사람은 별로 찾아 볼 수 없다는 게 오히려 이 책을 실감나게 만든다. 사실 유학생이 그 나라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은 어학원.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는 곳에 있다 보니 자연히 일본인보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더 많이 접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자기보다 어리면서 언제나 반말을 찍찍 하는 케냐인 마야카를 보며 ‘예의가 없다’고 생각한다. 불법 룸메이트가 만드는 닭다리 올린 밥이 싫다며 밥 때마다 저자의 방으로 기어 들어오는 스리랑카인 고타베야는 불편하다. 그 닭다리 올린 밥을 만드는 장본인인 패트릭이 빠진 머리를 어찌 해보려고 중국 의학의 힘을 빌리려는 모습은 불쌍하다. 매일같이 자신을 찾아와 이것저것 돌봐주는 리짱은 귀찮고, 일본인 남편에게 매일같이 가정 폭력을 당하는 에미상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거금을 떡하니 던져 준 야쿠자는 무섭지만 고맙고, 동성애자 스토커는 소름이 끼치는 한편 화도 난다. 저자의 시선은 매우 독선적이고, 한국적이며, 자기중심적이다.
그리고 이 책이 우리가 흔히 보는 외국 유학기와는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이 책의 내용이 전개되는 내내 저자에게서 포용의 시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포용은 어떤 의미에서 내가 남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 하는 행위이다. 내가 윗사람 된 도리에서 너를 받아주고, 너를 감싸주고 너그럽게 덮어주겠다는 다짐. 하지이 책의 화자인 저자는 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대신, 남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고 단지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을 불편한 채로, 귀찮은 채로 받아들인다.
저자는 이 책의 등장인물들과 어우렁더우렁 살아간다. 저자가 외국인들을 이토록 동등하게 바라 볼 수 있는 것은 아마 저자가 ‘대한민국이라는 선진국의 국민’이 아니라 ‘좆같이 가난한 유학생’신분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뭔가 찡한 느낌이 가슴을 울린다. ‘저 사람은 후진국 국민이니까 이 정도는 저자가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내 마음 한구석 자리하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런 억지스러운 아량보다는 진솔하게 직설적으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한 저자가 대견하다. 이 모든 이야기는 책장을 다 덮고 나면 더 깊게 와 닿는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제목이 <<고마워! 아리가또, 땡큐>>이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겠지만 사람들 하나하나는 저마다의 절절한 스토리를 안고 산다. 삶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끝이 없다. 그런 사연 하나하나가 모여 삶을 이룬다. 이 책은 거창한 삶의 노래에 대해 쓰기보다는 그런 사소한 사연 하나로 한 개인의 거대한 일생을 짐작하게 만드는 책이다.
‘고맙다’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남이 베풀어 준 호의나 도움 따위에 대하여 마음이 흐뭇하고 즐겁다’라는 다소 애매한 정의가 등장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고마워’는 꼭 남이 베풀어 준 호의나 도움에 응대하는 단어는 아닐 것이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고맙다’는 말은, 그의 청춘의 한 조각이 그에게 가르쳐 준 아릿한 추억의 맛에 대한 감사가 아닐까

글/사진: 밀라
따뜻한 햇살, 낮잠, 한밤중 소리 없는 산책. 내가 나로 있기 위해 꼭 지켜내야 하는 것들.
말라 님에 써주신 서평입니다.
저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는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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